30년전ㅡ 16살, 고등학교 1학년때, 4B연필을 커터칼로 셀 수 없이 깍았습니다. 학교 수업이 다 끝나면 미술반에서 처음에는 원, 사각형, 원뿔을 그리다가 어느새 아그리파 석고상을 두고 연필데생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여럿이 그림을 그리면,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 지우개로 지우는 소리, 가끔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 미술선생님이 말씀하실때를 제외하고는 사각사각 연주회는 계속되었습니다. 연필의 시간. 그 시간이 제게는 참 좋았습니다. 그림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다 잊을 수 있었거든요. 그림에만 집중하면 걱정과 근심과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아그리파를 그리다가 다음에 줄리앙을 그린다고 했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가을, 그만 미술반을 탈퇴했습니다. 엄마는 아파서 매일 누워있었고 엄마의 식사를 챙겨드리고 엄마대신 집안일 혼자서 다하고 누나인데 아들처럼 남동생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250부를 구르마(손수레)에 실고 6시까지 주택가, 아파트, 상가에 신문배달을 하고 학교갈 준비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학교끝나고 디딤돌 대학수학문제집 만드는 워드아르바이트를 하고 마감뉴스할때 집에 도착했던 기억이 납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 피곤해서 거의 매일 꾸벅꾸벅 서서 졸았습니다. 방학때는 철판볶음밥 식당, 짜장면집, 대형마트 야채코너나 피자집에서 알바를 하고, 3학년때는 추가로 저녁시간과 주말에 편의점알바까지 했습니다. 공부만해도 부족하다는 고교시절, 친구들이 나를 이모나 엄마처럼 생각하던 시간, 대학가려고 학원다니며 여러가지를 해야 한다며 고민하는 친구들, 시험성적으로 문제 하나 틀리고 맞는 것에 일희일비하던 친구들, 나에게는 친구지만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미 그때 저는 저희집 가장이었습니다. 연필 한다스, 스케치북도 마음껏 편하게 살 수 없었던 시간이었지만 보람이 있었고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만큼 그릴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5~26년만에 그림을 다시 시작해서 40대에 그림을 4~5년째 그리네요. 그때 연필을 들고 꿈꾸었던 것들을 지금은 다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4B연필을 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때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요. 과거의 나에게 고맙습니다. 나에게 칭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