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읽기

몇 년 간 시험 공부를 마친 이후로 도무지 아무 것도 읽고 싶지 않았다. 종이에 빼곡히 들어선 활자를 보기만 해도 질리는 느낌이랄까. 한동안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2주 후 한 번 연장, 4주 후에 그대로 가져다 반납하는게 일상이었다. 머리에 구름이 낀 것처럼 멍했다.

다시 읽기 시작하게 된 건, 의외로 유튜브 알고리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연말 정산 시즌에 맞추어 유튜브가 띄워준 영상을 거쳐 파도타기를 하다 보니 어떤 부동산 유튜버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일 년 동안 하루에 한 권씩 투자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하다 보니 내공이 쌓여서 투자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하루 한 권은 몰라도 일 년에 백 권 정도는 가능하겠는데?’ 부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새해 목표를 냅다 ‘책 백 권 읽기’로 정했다.

처음에는 재테크 책만 백 권을 읽을 생각이었는데, 한두 번 고개를 돌리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졌다. 내가 막연하게 인지하던 세상을 과학이라는 렌즈로 또렷이 비춰주는 책,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분야에 대해 재미있게 알려주는 책, 나를 온통 울리고는 포근히 안아주는 책까지⋯⋯.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자 무한한 세계가 내 앞에 있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책을 다시 읽으면서 머릿속 구름이 스르르 걷혔다는 거였다. 뇌세포들이 저마다 반짝이면서 연결되는 것만 같았다.

‘다시 읽기’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나는 ‘비로소 읽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초중고를 거치면서 책을 많이도 읽었고, 심지어 대학 때는 영문학과였지만 진정으로 즐기면서 읽은 순간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읽는 순간은 즐거웠지만, 그 책에서 꼭 무언가를 배워야 했고, 서평을 쓰거나 퀴즈를 풀어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저 좋아서 읽고, 원해서 쓴다. 책으로 세상을 배우는게 재미있고 신난다. 그리고 앞으로 읽을 나날들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자유이용권을 끊고 놀이공원에 막 입장한 느낌이다.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그저 즐겁게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