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필

연필의 흐릿흐릿한 느낌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중학교 이후로 10년 넘게 연필을 쓰지 않았다. 나는 선명하고 확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모든 공부는 펜으로 했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간이 부족해서는 안되니까, 거침없이 정답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내가 연필을 다시 잡게된 건 취직을 하면서부터다. 업무 특성상 누군가의 보고서를 수정할 일이 많은데, 펜으로 죽죽 선을 긋는게 부담스러웠다. '당신은 틀렸어요!'하고 선명하게 외치는 것만 같아서. 반면 연필은 이런 느낌이다. '당신 말도 맞아요. 하지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펜 대신 다시 연필을 쓰게 된 것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드러움의 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생에는 꼭 확실한 답만 있는 건 아니다. 고쳐쓰고, 또 고쳐쓰는 과정 자체가 인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