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눈이 오면 설렌다. 아니 들뜬다. 강아지가 눈 밭에 뛰어놀듯 눈만 오면 어디든 가고 싶다. 눈사람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장독대 위나 담벼락 같은 곳에 눈사람 인형을 나란히 만들어 두곤 했다. H에게 눈사람에 대한 추억은 너무 많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특히 아무도 밟지 않은 은밀한 장소를 좋아하고 사박사박 그 위를 걷길 좋아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 눈사람을 남겨두곤 했다. 눈사람은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눈은 결정체가 있고 뭉치면 단단해지는 물질의 성질을 가졌다. 하지만 눈은 시계 추의 법칙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다. 눈사람을 만들고 거기에 추억을 심고 영원을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2013년 어느 겨울, H는 미술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쏟아지듯 함박눈을 보며 아이들에게 눈싸움을 제안했다. 그림 그리다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얏호"를 외쳤다. 그리던 그림을 마무리하고 나가보니 제법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장갑이 없는 아이들은 H가 준 목장갑을 끼고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요이땅할 사이도 없었다. 순식간에 날아온 눈 뭉치. H의 왼쪽 볼 밑을 정확히 강타해버렸다. 차가움에 놀란 H는 "누구야"하며 고개를 돌렸고 수영이는 웃으며 도망을 치고 있었다. 질세라 눈덩이를 두 개 만들어 뒤따라 갔다. 이렇게 이어진 눈싸움은 지칠 줄을 몰랐고 아이들은 쌕쌕거리며 서로를 향해 눈 뭉치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선생님"하고 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만들었는지 아이 키의 반만 한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떤 아이는 눈사람의 몸통에 눈을 덧붙여 주었고 어떤 아이는 눈을 새로 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사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광경이 꼭 눈사람 왕국에 온 것 같았다. 제각각의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눈사람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눈사람으로 변신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다.

눈사람은 순수함의 결정체 같다. 세상에 잠시 존재했다가 이내 사라지지만 그 순수함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가 눈사람이라는 결정체를 만들어 놓고 간다. 영원하지 않지만 순수함은 또한 영원성을 가졌다. 언제 어느 때 내 마음에 불시착처럼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H는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순수함일지라도 기다린다. 이번 겨울에 울툴불퉁 못생긴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