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 10월 14일

참가자 : 조은희, 윤경희, 정미숙, 오실님, 문보라, 이미정, 한혜란, 오니온, 미쉘정

국가론 에세이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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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의 철학적 의미

플라톤의 저서로 ‘국가 혹은 정의에 대하여’라고 불리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서양철학사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영향을 끼첬다.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국가론》은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저작물로 형이상학에서부터 정치학, 윤리학, 심리학 그리고 예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모든 분야에 가지를 뻗고 있는 플라톤 철학의 정수가 담긴 책이다. 서양철학의 근원이 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므로 각종 추천도서 리스트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국가론》은 사실상 서양철학의 모든 줄기를 거느리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현대에 와서 쟁점이 됐거나 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 공산주의를 비롯해 우생학, 여성해방론, 산아제한의 문제, 니체와 루소가 거론하고 있는 도덕의 문제, 사회계약에 관한 문제는 물론이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어 가히 ‘철학적 향연’을 벌여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국가론》이 지니는 의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말하는 이상국가는 논란의 소지가 적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그의 공산주의적 사유방식이다.

권력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란 이유로 사유재산을 불허하고 가정 해체를 주장하는 등 다소 황당한 주장들이 있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국가론》에 의혹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또 질서만을 강조하고, 시인마저 추방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를 개인의 창의성이나 변화에 대해 무지하다며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플라톤(Platon, BC427 ~ 347년)

아테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20살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그는 소크라테스가 사형되자 큰 충격을 받고 세계 곳곳을 방랑했다. 기원전 385년에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기원전 367년에 디오니시오스 1세의 뒤를 이은 디오니시오스 2세와 디온의 초청을 받고 시라쿠사를 방문했다. 플라톤은 그를 통해 자신의 국가를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347년 제자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후 사망했다.

대화편

철학 중심의 종합 학교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운 후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글을 저술하여 그 안에 자신의 철학도 담기 시작했다. [파이돈], [크리톤], [향연], [국가], [프로타고라스], 등 35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전부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대화편]이라고 불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저술활동으로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사상을 엿보려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의존해야 한다. 초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짙게 느낄 수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소크라테스 철학을 근간으로 한 플라톤 철학이 나타난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88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에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는데, 플라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 활동은 아테네 법에 위배된다 하여 사형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지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참된 “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귀납법에서 찾고, 사람들의 대화에 의한 문답법에서 독단적인 잘못된 지식을 비판하고 제겨하면서 일반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불리우는데 그는 이것을,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산파술’이라 칭했다. ‘영혼’을 주제로 한 그의 학설은 정신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것이고 이것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게 계승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저작은 없으나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조작에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