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시절인연’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인연이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하는 인연이 있다는 말이다. 나의 시절인연은 전 남자친구였다. 사실 이 글감을 처음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해볼까도 고민했었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그에게 처음 지어줬던 별명인 ‘레몬씨’라고 표기하고 적어보겠다.

레몬씨와 난 내가 20살 때 처음 만났다.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조장 오빠의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나의 취미는 캘리그라피 였는데, 레몬씨도 그 당시에 캘리그라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장 오빠에게 나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대학교 캠퍼스 카페에서 같이 글씨를 적었고, 그게 첫 만남이었다. ‘천년백설’이라는 시를 적고 밖을 나서는데 하늘에 눈이왔다. 그때는 3월이었기에 우리는 서로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카톡을 주고받다가 마음을 나눴고, 연애를 시작하였다. 학교에 있는 모든 의자는 우리의 공간이 되었고, 학교도서관에서 공부도 같이하고 풋풋한 연애를 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했지만, 그렇게 1년 정도를 만나고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나는 장기현장실습을 통해 꿈꾸던 연구원에서 6개월동안 일을 하게 되었다. 꼭 연구원이 될 수 있을것이라며 나를 묵묵히 응원해주던 레몬씨가 다시 떠올라서 먼저 연락을 했다. 카톡을 주고 받았고, 자연스럽게 전화로 서로를 응원했다. 그렇게 우리는 2년 정도만에 다시 약속을 잡게 되었다. 어색한 시간은 잠시 뿐이었고, 다시 만난 그 날에 서울에 같이 갔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적은 글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그 고속버스 안에서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잡았던 게 기억난다. 내가 서울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그 전에 사진관에 들렀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는데 옆에서 기다려주고, 사진을 같이 골라줬다. 그러다가 나는 친구를 만나고 레몬씨는 지하철을 타고 다시 청주로 돌아갔다. 그렇게 헤어지곤 아무일도 없이 지나갈 줄 알았는데, 내가 카톡으로 물었다. 왜 같이 서울에 왔냐고, 왜 보고싶다고 말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아까 헤어지기 전에 다시 만나자고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고 말했다. 레몬씨가 나에게 다시 만나자고 카톡으로 고백을 했는데, 내가 전화로 다시 고백을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레몬씨가 나에게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 고백을 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9개월 정도를 만나다가 우리는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먼저 카톡을 했던 것 같은데, 전화를 주고 받다가 다시 약속을 잡았다. 처음 만나는 날에 내가 청주에 가서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레몬씨네 집에 가서 잠을 잤다. (아무일도 없었고 정말 잠만 잤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데 그때는 잠옷을 입고 서로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게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사귀자는 말도 없이 인사를 하곤 다시 연락이 드문드문했다. 어쩌다가 약속을 다시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번에는 내가 있는 대구의 이월드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루만 사귀는 것처럼 지내보자고 하고, 우리는 커플 머리띠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하루종일 놀다가 근처 막창집에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숙소로 들어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대범한 일들이 그를 만날 때는 참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1년정도를 다시 만나다가 이런저런 일들로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사실 요즘도 문득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날 때가 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꿈에도 가끔 나온다. 아마 오늘도 이렇게 많이 떠올렸으니 꿈에 나오게 되지 않을까. 아직은 다시 만날 용기가 없고, 지금의 내 생활이 좋아서 만족하지만 레몬씨는 나에게 참 신기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이 아닐까. 우리는 참 많이도 편지를 나눴고, 참 많은 대화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의 구절을 적어보며 오늘의 글을 마쳐보려고 한다.

아, 지금 그와의 추억 상자를 열어보면서 펑펑 울었다. 너무 소중하지만 아픈 기억이어서 외면하고 있었나보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올까. 그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아래의 글은 레몬씨가 적어준 나의 장점 중의 하나이다.

“사람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관계를 소중이 하고 원만히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심성이 착하고 여리다.(배려심이 깊다) 비록 지금 당장에 힘들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꼭 빛이 나리라 믿는다. 어는 다른 이들의 빛을 흡수하는 비열한 블랙홀이 아니라 스스로 밝은 빛을 내는 항성이다. 그러므로 결국에 주변의 블랙홀들을 다 이겨내고서, 밝은 및을 낼 것이고 주변의 별들이 다 너를 알아보고서, 밝은 빛을 내는 너의 곁으로 몰려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