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칠 년 만의 회우

전화기 너머로 J언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 기분이었다. 방송국 휴게실에 덩그러니 놓인 자판기와 퀭한 눈으로 믹스 커피를 마시는 피디, 그리고 한쪽 구석에 앉아 누가 들을세라 조심조심 이야기를 나누는 J언니와 내가 보였다. 언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던 십칠 년 전 그날의 모습이었다.

"보라야, 내가 왜 이 일 그만두는 줄 알아?"

J언니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방송국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목표는 교양 프로그램 작가가 아니라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야. 그래서 서울로 가려고. 나는 중학교 때부터 글을 써왔기 때문에 자신 있어. 꼭 성공할거야."

그때까지 나는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J언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경이롭게 다가왔다. J언니는 내가 자신의 후임으로 방송국에 들어왔지만, '네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걱정'이라며 가는 날까지 날 걱정했고, 진심으로 '이 길이 너에게 맞는 길인지 고민해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 나는 글이라고는 써본 적도 없는 데다 내게 맡겨진 임무가 자료조사인데 인터넷 검색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서야 작가실 언니들은 내가 방송 프로그램 모니터 요원으로 면접을 봤다가 그 자리에서 면접관이 '신문방송학과니까 자료조사 한 번 해보지'라고 해서 작가실에 오게 됐다는 걸 알았고, 내가 일을 잘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주었다. 나는 J언니와 작가 언니들의 말에 오기가 생겨 날을 새가며 선배들의 원고를 필사했고, 정식 작가로 입봉 제안을 받은 후 그곳을 떠나 더 큰 방송국으로 옮겼다.

그후 J언니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몇 달 전 남편에게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을 위해 작가님을 한 분 소개 받았는데, 이야기 끝에 전주 출신이라는 걸 알고 '제 와이프도 전주에서 방송 작가를 했는데 이름이 문보라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그 작가님이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보라요? 정말이에요? 진짜 문보라에요?"

J언니는 같은 말로 여러 번 묻더니 자신이 전주를 떠날 때 후임으로 들어온 막내 작가가 바로 보라였다며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는지 신기하다고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했다. 나 역시 남편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입이 쩍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길로 나는 J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22살이었던 보라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독서수업을 하는 샘으로 성장했고, 25살이었던 J언니는 시청률 47%를 찍은 주말 드라마에 이름을 올린 건 물론 어린이 영화,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대본을 쓰는 정말 성공한 작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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